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검색어 입력 바로가기

인천설화

안하지 고개

작성자
옛날 옛적에 인천은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4323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군.”
그때부터 한자의 기러기 안(雁)자를 써서‘기러기가 내려 앉는다’는 뜻으로 안하지(雁下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이다. 이성계는 새 도읍지를 정하려고 무학대사를 시켜 적당한 장소를 찾게 하였다. 무학대사는 한양을 거쳐 부평에 왔다.
“이곳은 들이 넓고 비옥하여 새 나라의 수도로 삼을 만하군.”
무학대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했다.
“아, 참으로 아깝군. 풍수의 이론으로 보면 이곳에 백 개의 고개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 아홉 개밖에 없지 않은가.”
그의 말에 따라 그때부터 아흔아홉 번째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것이 안하지로 바뀌었다.
위에서 말한 원통현도 이 전설과 연관하여 또 다른 뜻이 있다.
무학대사는 탄식했다.
“아, 고개가 아흔아홉 개밖에 없으니 원통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원통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위의‘굴포천과 원통이 고개’에서 말한 김안로의 운하사업과 관련된 전설이다. 그때 운하를 만들면서 세 번째 시도로 굴포천에서 현재의 청천동 청천천과 연결시켜 수로를 깊이 팠다.
“여기도 실패하면 그 때는 끝이야. 어떻게든 성공해서 전하와 조정의 걱정을 덜어야 해.”
그는 일꾼들을 독촉해 청천천을 깊이 팠다.
그때 깊이 판 청천천이 고개 안에 있는 형상이 되었던 터라 ‘고개 안에 있는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내하지(內河地)’라 했는데 그 말 중 한자의 안 내(內)자가 우리말로 변해 안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주막에서 술을 파는 여인의 이름과 관련된 전설이다.
1884년 조선 조정은 현재의 원창동 갯말(한자음을 빌어 포리라고도 했다)에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포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 전조창이라는 세곡 보관 창고를 지어 세곡을 보관했다가 때에 따라 필요한 만큼 우마차에 싣고 한양으로 갔다.
우마차 짐꾼들은 현재의 가정동과 청천동 사이에 있는 고갯길을 넘으면서 한 번씩 쉬며 지친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자신들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그들이 쉬고 간 주막에‘안아지’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여러분, 애쓰셨어요. 어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세요.”
그녀가 반색하여 외치면 우마차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마차를 세웠다.
“안아지, 그대는 참 아름답소. 그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준다면 우리는 더욱 행복할 것이오.”
사람들은 땀을 닦으며, 막걸리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아지라는 여인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주막 밖으로 나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마차꾼들은 그렇게 한숨을 돌린 뒤 다시 정부 세곡을 실은 우마차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한 곳의 땅이름을 두고 이렇게 네 가지 전설이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고개였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서울대학교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립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 중에 옛 지도가 있는데 그것에는 안하지 고개가 ‘구십현(九十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실려 있다.

공공누리
공공누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제4유형)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