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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원적사의 빈대와 말무덤

작성자
옛날 옛적에 인천은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882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이 산에 원적사(元積寺)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었다. 풍광이 좋은 숲속에 들어앉은 데다가 도량에 있는 샘물이 맛이 좋았다. 스님들도 불심이 깊고 신자들에게 친절했다.
어느 해부터인가 빈대가 생기더니 점점 늘어났다. 수천 수만 마리가 법당의 마루 틈과 기둥 틈에 들끓었다. 그러다가 스님이나 신도가 들어오면 한꺼번에 진군하는 병사들처럼 쏟아져 나와 몸으로 기어올라 마구 물었다.
절을 찾아 왔던 신도들이 몸을 긁으며 울상을 했다.
“주지 스님, 빈대에 수십 군데를 물렸어요. 빈대를 끝까지 안잡을 건가요?”
주지 스님은 미안한 표정을 했다.
“빈대도 생명인 것을 어떻게 살생을 합니까?”
신도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신도가 줄어드니 절 살림이 어려워지고 스님들은 예불을 해도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민가로 탁발을 하러 가면 개구쟁이들이 놀려댔다.
“빈대절에서 온 스님, 빈대처럼 생겼네!”
절을 싫어하는 어른들은 쏘아붙였다.
“빈대나 잡아먹으면 배부를 텐데 무슨 탁발을 해욧!”
탁발 스님들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지친 몸을 눕히면 빈대가 어디 갔다가 왜 이제 왔느냐 하는 듯이 덤벼들었다.
참다 못한 젊은 스님들은 볼멘소리를 했다.
“주지 스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주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모두 우리의 불심을 확인하려고 부처님이 주는 시련이네. 참고 이기면 빨리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이네. 사명당 유정대사님은 임진왜란 직후 왜국에 갔을 때 왜의 왕이 쇠로 만든 방에 가두고 펄펄 끓게 불을 땠으나 참으셨네.”
주지 스님은 절에 빈대가 많아진 것이 부처님이 자신과 젊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불심을 확인하려고 시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불심이 깊던 주지 스님도 두 손을 들었다.
“나도 못 참겠네. 어서 빈대를 잡으세.”
주지 스님은 젊은 스님들과 함께 빈대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데다가 빈대란 놈들이 사람이 잡는다고 없어질 놈들이 아니었다. 잡을수록 더 늘어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주지 스님은 불상 앞에 눈물을 흘리며 고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빈대가 끊이지 않는 것이 이곳이 불도의 도량으로 적당치 않다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곳으로 옮겨 모시고자 하옵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불공을 드려도 빈대가 없어지지 않고, 하루에 한 말(斗)씩 잡아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절을 옮기라는 부처님의 계시라고.
절 살림이 어려워졌지만 말 한 마리는 남아 있었다. 스님들은 말 등에 길마를 얹고 불상과 중요한 기물을 실었다.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움막이라도 짓고 시작하세.”
주지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주지스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짐을 가득 실은 말은 산비탈을 내려오다가 실족해 골짜기로 굴러 죽어 버렸다.
주지 스님은 거꾸로 처박힌 불상을 내려 반듯이 모셔 놓고 울먹였다.
“부처님, 도대체 저한테 어쩌라는 겁니까?”
스님들은 불상과 기물들을 죽은 말과 함께 산기슭에 묻었다. 사람의 무덤처럼 봉긋하게 봉분을 만들었다.
그 뒤 주지스님과 젊은 스님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년이나 2백년이 흐른 뒤에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원적사의 말 무덤’ 또는 ‘원적사의 부처 무덤’이라고 불렀다.
더 많이 세월이 흐른 뒤에 다른 스님들이 불상을 찾아 새 절을 세우려고 그 봉분을 파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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