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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교동면 읍내리(邑內里)

분류
강화군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33
○궤네
화개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읍내를 감돌아 저수지를 이루고 산포 앞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남문안
교동 읍성의 남문 안쪽에 있는 마을.
○남산
읍내 서남쪽에 있는 높이 53m의 산. 조선시대 진망산(鎭望山) 봉수가 있었는데 서남쪽의 말도(末島) 봉수를 받아 교동 본영에 전했다.
○남산진(南山津)
남산포에 있는 나루터.
○남산포(南山浦)
남산포 가에 있는 마을. 포구에는 교동부 시절 대변창(大變艙)이 있어 병선(兵船)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조선소도 있었다.
○동진(東津)
읍내 동쪽의 나루로 인화나루라 하며 석모리를 왕래했다.
○동진원(東津院) 터
동진가에 있던 옛 공공여관인 동진원이 있던 터.
○동편(東便)
동진포 가에 있는 마을.
○독신각(纛神閣) 터
남산 동편 기슭에 있는 중군(中軍)의 큰 기인 둑신에 제사하던 곳.
○문무정(文武井)
화개산 기슭에 있는 샘. 동서로 둘이 있었는데 동쪽을 문정, 서쪽을 무정이라 했다.
○부근당(扶芹堂)
읍내리 251번지에 있는 여신(女神)을 모신 신당.
○북문밖
읍성 북쪽 바깥쪽에 있는 마을.
○사신관(使臣官) 터
읍내리 571번지에 사신관이 있던 터. 옆에는 사신당이 있었고 바닷가의 바위들에는 정으로 쪼아 만든 층층대가 있었는데 배를 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조선중엽 이후 군기고로 사용되다가 그 뒤 통어사 정기원(鄭岐源)이 고쳐 창고로 썼는데, 방어사 이근영(李根永)이 읍내로 옮겼다.
○사신당(使臣堂)
사신관 터에 있는 당집. 고려 사신이 송에서 배로 귀국할 때 뱃길이 무사하길 빌던 곳이다. 당집은 6·25전쟁 때 없어졌는데 1969년 다시 세우고 어부들이 제사를 지낸다.
○상여바위
동진포 동남쪽에 있는 여. 매처럼 생겨서 매녀, 매바위, 응암, 응암여로도 부른다.
○서문밖
읍성 서문 밖에 있는 마을로 줄여서 섬 밖이라 부른다.
○성문교(城門橋)
서문안 북쪽에 있던 다리.
○안양사(安養寺) 터
읍내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있던 안양사의 터.
○안해루(晏海樓) 터
동헌 터 남쪽에 있는 안해루의 터. 헌종 9년(1668) 통어사 구문치(具文治)가 세웠고, 영조 16년(1740)에 통어사 조호신(趙虎臣)이 증축하였다.
○영말래
장거리 위쪽 마루테기에 있는 마을. 읍내리에 교동부가 있을 때 육방관속들이 이곳까지 풍악을 울리며 새로 부임하는 원을 맞았다. 영말루, 영마루라 부르기도 한다.
○영창말
남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 교동 진영의 창고가 있어 영창(營倉)마을이라 부르던 곳이다. 영청멀이라고도 한다.
○옥담거리
교동부의 옥의 담장이 있던 곳에 있는 마을.
○장거리
옥담거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장이 서던 곳이다.
○절아래
읍내 서북쪽 화개암 아래에 있는 마을로 사하동, 사하라고도 부른다.
○철종잠저
1844년 철종이 어렸을 때에 강화읍에서 잠시 교동으로 피신하여 3개월 간 살던 집터.
○큰장다릿골
절냇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화개산(華蓋山)
교동면 읍내리, 상룡리, 고구리, 대룡리에 걸쳐있는 교동의 종산(宗山). 높이 295.5m로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 동쪽으로 하음산성, 남쪽으로 망산봉수에 응하였다. 화개산에는 내외성이 있었으나 내성만 터가 남아있고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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