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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동인천동 긴담모퉁이

분류
중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78
경동 싸리재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긴담모퉁이가 있다.
이름 그대로 돌담이 길게 놓여 있어 생긴 이름인데, 이제는 싸리재와 마찬가지로 거의 잊혀져 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의 돌담은 흔히 오태태(吳泰泰)라는 중국 사람이 살면서 자기 집 바깥에 쌓은 담이라고 전해오는데, 그에 대해 달리 전하는 이야기가 없어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이보다 긴담 모퉁이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이곳에 신작로를 낼 때 쌓은 축대 때문에 생긴 이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곳은 원래 신흥동과 경동 사이에 솟아있는 야트막한 구릉지였다. 지금 송도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신흥동과의 경계지 일대에는 1900년대 초반까지도 인가가 거의 없는 대신 일본인들의 묘지와 절이 있었다. 이곳에 묻혀있던 일본인들의 상당수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그 뒤 1902년쯤 이곳에 있던 묘지들은 인근 율목동에 새로 만들어진 공동묘지로 옮겨졌고, 그 대신 신흥동에서 이곳을 지나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으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가 추진됐다. 이는 신흥동 일대 지계(地界)에 살던 일본인들이 축현역과 그 일대 한국인촌까지 편하게 오가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이곳에는 구릉에 꼬불꼬불한 흙길 하나만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인들이 중심이 돼 이곳의 구릉을 잘라 헤치고, 긴 축대를 쌓아 올려 그 사이로 도로를 만든 것이다. 최성연(崔聖淵)이 쓴 향토사 책자 『개항과 양관역정(洋館歷程)』에 따르면 이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07년 4월이었고 그해 11월에 끝났다고 한다. 이때 공사를 주도한 사람은 산근(山根)이라는 이름의 일본군 육군 소장으로, 러일전쟁 당시 병참부의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공병대를 이끌고 지금의 전동에 있었던 전환국(典記局) 청사에 주둔하며 이 공사를 맡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돌담은 생긴 것이고, 긴 돌담이 신흥동과 만나는 곳에서 끝나며 옆으로 돌았으니 긴담모퉁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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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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