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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신흥동

분류
중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444
신흥동 신흥동(新興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개항 초기까지 시의 외곽 지역이어서 사람은 거의 살지 않고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던 곳인데, 특히 청일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들의 공동묘지가 이곳에 있었다. 이곳의 화장터나 공동묘지는 그러나 화개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갖기 전에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 시절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던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1903년 화개동(花開洞)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바닷가 쪽으로는 1910년대에 매립이 될 때까지 물이 들어오는 곳이 많아 ‘모랫말’이라 불리기도 했다.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라는 이름은, 그 말이 들어가면 대개가 그렇듯, 이 동네에 사창가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그를 따라 들어온 일본인 몸파는 여성들이 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생활했던 탓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 화개동을 조금 다른 발음으로 ‘화가동’이라 부르곤 했고, 우리말로 ‘꽃골말[花谷村]’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곳의 사창가는 그 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가 공식 인정한 공창(公娼)이 됐다가 광복 직후에 폐지된다. 일제는 1912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 화개동의 일부와 주변의 신창동, 와정동(瓦鼎洞) 일부를 합쳐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으로 화정(花町)이라 했고 1가동, 2가동, 3가동으로 구분했다. 이중 와정동은 ‘기와를 굽는 곳이 있다’는 뜻이다. 광복 뒤 이곳 화정이 신흥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는데,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한다’는 뜻이다. 화정으로 불릴 당시 1가동, 2가동, 3가동이었던 곳은 신흥동이 되면서 역시 1가, 2가, 3가가 됐다.

신선동
신선동(新仙洞)은 1983년에야 생긴 동이다. 당초에 신흥3동과 선화동이었던 것이 1977년 신흥2동이 됐다가, 1983년 시 조례에 따라 다시 신선동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신흥3동과 선화동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중 신흥동은 광복 뒤에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고, 선화동은 1912년 일제가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들 두 동네 모두가 지금의 이름을 얻기 전에는 ‘화개동(花開洞)’이라 불렸고 우리말로는 ‘꽃굴’이라고 불렀다. 이는 일본인들이 이들 지역에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여 지내는 이른바 ‘유곽(遊廓)’을 만들어 운영했기 때문이다. 땅 이름에서 ‘화개(花開)’나 그 발음이 조금 바뀐 ‘화가’, 또는 우리말로 ‘꽃’자가 들어가면 대개 그렇듯이 여색(女色)이 무척 번성했던 곳이지만, 인천항이 개항할 무렵은 물론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이 동네는 한적한 부두와 시골마을일 뿐이었다. 특히 신흥3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상당 부분이 바다였던 곳이다. 그것이 1910년대에 창고 터로 일부가 매립됐고, 2차로 1960년대에 대규모로 또 매립돼 새로 땅이 생겼다.

선화동
신선동의 일부인 선화동(仙花洞)은 옛날 사창가(私娼街)가 있어서 유명했던 곳이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이 마을은 인천부 다소면(多所面) 선창리에 속해 있던 1900년대 초까지 별다른 동(洞)이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1903년 부내면이 새로 생길 때 그곳에 들어가며 화개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개’라는 말이 들어가는 땅이름이 거의 그렇듯이, 이곳에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0년대 초부터 유곽(遊廓)이 생겨 그 뒤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됐다. 유곽이란 사창가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으로, 인천항 개항 뒤 인천에 많이 모여 산 일본인들을 따라 몸을 파는 일본 여성들이 모여들어 생기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인천여상 부근과 답동성당 언덕 아래, 인일여고 아랫길 주변 등에 이 같은 사창가가 생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 상가가 계속 늘어나자 선화동에 ‘부도루(敷島樓)’라는 일본식 유곽을 짓고 이곳으로 여인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이곳의 유곽은 일제 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한국인 공창(公娼)이었으며, 이곳서 멀지 않은 지금의 만석동 등지에는 일본 여자들이 몸을 파는 일본 공창이 있어 모두가 광복 전까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선화동의 유곽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으로 바뀌었으나, 당국이 윤락 행위를 묵인하는 이른바 ‘특정지역’은 주변의 숭의동과 학익동 등에 대신 생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어쨌든 화개동은 1912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지금과 같은 선화동으로 이름이 바뀐 뒤 그 이름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인들이 새 이름을 이처럼 지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꽃 화(花)자를 집어넣은 것으로 미뤄 이 역시 화개(花開)의 뜻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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