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동
재래시장이 있는 신포동(新浦洞)의 원래 이름은 순 우리말로 ‘터진 개’였고, 한자로는 ‘탁포(韓浦)’였다. 지금은 모두 매립돼 옛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원래는 이곳이 바다에서 가까워 바다 쪽으로 터져 있고,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동네는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겼는데,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창동(新昌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원래 이곳은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지계를 넘어 들어와 살기도 했다. 신창동은 1930년대 들어 이름이 바뀌는데, ‘터진 개’를 한자로 바꾼 ‘개포동(開浦洞)’이나 일본식인 ‘화정(花町)’이라고 불렸다. ‘화정’은 ‘유곽촌(遊廓村)’ 곧 사창가를 뜻하는데, 지금의 답동성당 언덕 아래나 인천여상 주변에 일본인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 때 ‘신정(新町)’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광복 뒤인 1946년 신포동이 되니, 이는 ‘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1977년에는 시 조례 제1075호로 사동, 신생동, 답동과 신포동을 합해 행정동으로 신포동이 됐다.
사동
사동(沙洞)은 구한말에 인천부 부내면 지역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섬이었다. 모래가 많은 섬이라 해서 사도(沙島)라 불렸고, 조그만 선착장도 갖추고 있었는데,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이 일대 바다를 매립해 자신들이 사는 거류지를 만들면서 육지가 됐다. 사도는 육지와 연결되기 전 ‘오푼도(五分島)’라 불리기도 했으니, 이는 한동안 이 섬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5푼 짜리 가짜 돈을 만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이름을 바꿀 때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빈정(濱町)’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계속 사용되다가 광복 뒤인 1946년 사동이 됐다. 이는 물론 예전의 이름인 사도와 연관지어 지은 것이다. 1977년에는 인근의 답동, 신생동과 합쳐져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들어갔다.
신생동
신생동(新生洞)은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지역이다. 대부분이 황량한 바닷가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었다. 1876년 인천항이 개항하자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 언덕부터 바닷가까지 약 7000여 평에 이르는 땅에 자신들의 조계를 세웠다. 개항 당시에는 348명에 불과했지만 청일전쟁 이후 그 수가 크게 늘어 4300여 명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차츰 해안을 매립해 조계를 넓히기 시작했다. 대부분 바다였던 신생동을 비롯해 지금의 해안동, 사동 일대는 일본인들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해 1910년대까지 계속 매립을 해서 새로 생긴 땅이다. 일본인들은 1912년 이곳에 ‘궁정(宮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이곳에 자신들의 신궁(神宮), 곧 신사(神社)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1890년 세워진 이 인천신궁은 일본왕의 조상이라고 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사당으로, 일제시대 내내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지 참배를 해야했던 곳이다. 신궁이 있는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공원을 만들었는데 이를 ‘동공원(東公園)’이라고 불렀다. 그 뒤 광복이 되자 1946년 이곳은 신생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됐으니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새로 터전을 잡았다’는 뜻이다. 1977년 신생동은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편입됐다.
답동
답동(沓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던 땅이다. 이 지역 대부분의 땅이 그렇듯 개항기까지 한자식의 땅이름은 없었던 듯하며, 우리 이름으로는 인천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이곳의 대부분이 논이었기 때문에 ‘논골’로 불렀다고 한다. 논골은 한자로 바뀌어 답리(沓里)라고도 했고, 탁계(濁溪)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탁계’는 ‘깨끗지 못한 개울’이라는 뜻이니 이곳에 있던 개울에 깨끗하지 않은 물이 흘렀던 것 같다. 이 개울은 바닷가로 통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답동을 포함한 신포동을 ‘바다로 통하는 내가 있다’하여 흔히 ‘터진개’ 또는 한자어로 ‘탁포(韓浦)’라 불렀던 것이다. 이 논골이 1903년 8월 인천부에 부내면이 새로 생길 때 한자로 이름이 바뀌어 답동이 된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일본식으로 사정(寺町)이 됐고, 1936년에는 욱정(旭町)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에 다시 답동이 됐다. 이곳의 바닷가 쪽으로는 지금처럼 매립되기 전까지 염전들이 있어 염벗말, 곧 소금밭 마을이라 불리던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논골이 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다 쪽으로 늘어져 있는 마을’, 곧 ‘는골’이라 불리던 동네 이름에서 는골>능골>논골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언어학자들에 의한 이런 해석은 ‘논고개’ 마을로 불렸던 남동구 논현동과 같은 경우로, 이 두 곳 모두의 땅 형태가 조금 높은 곳에서 바다 쪽으로 늘어지듯 서서히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따져보면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답동은 ‘는골’이 변해 생긴 ‘논골’을 잘못 해석해 붙인 이름인 셈이다. 답동은 1977년 행정구역상 신포동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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