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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서창동(西昌洞)

분류
남동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2988
서창동(西昌洞)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곡식 보관용 창고 서창(西倉)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구한말까지 이곳은 인천부 조동면 설래리(雪來里), 곧 설래마을이었는데 향토사학자들은 설래리가 ‘배[船]가 들어온다[來]’는 뜻의 ‘선래리’에서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본다. 옛날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여서 배가 드나들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인데, 그 해석이나 발음이 다소 어색한 점이 있다. 또한 이와 달리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던 동네 이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배가 들어온다’는 뜻외에 달리 해석한 경우는 아직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이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을걷이 뒤에 나라에 세금으로 내거나, 봄에 장리(長利)로 빌린 뒤 되갚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는데 이 창고의 이름이 서창이었다. ‘서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으로 당시 북쪽에는 북창, 동쪽에는 동창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과 마찬가지로 서창 역시 언제 만들어졌다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선후기에 삼남(三南)지방에서 거둬 올린 곡식을 보관해 두었다가 서울로 가져가기 위한 창고로 전조창(轉漕倉)이 있었고, 전조창의 곡식을 서울로 나르는 일을 맡은 부서가 전운서(轉運署)였다. 전운서가 1883년에 생겼다가 1894년에 없어졌다고 하니, 서창도 대략 이 무렵에 생겼다 없어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당시 전국에는 10곳의 전조창이 있었는데, 서창은 서울의 용산창(龍山倉)과 함께 전라도·충청도 지방의 아산, 익산, 영광, 나주 전조창에 있던 곡식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야적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창고와 관계된 땅이름이 인천에는 서창동과 서구 원창동(元倉洞)이 있다. 선래마을은 1903년 설곡리, 설래리, 독곡리 등으로 나뉘어졌다가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서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서창리라는 이름은 『인천부읍지』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미뤄 일제가 새로 지어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던 서창을 따서 붙인 이름임에 틀림없는데, 그 한자 표기를 ‘서창(西倉)’이 아닌 ‘서창(西昌)’이라 함으로써 그 뿌리를 알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배가 들어오는 것과 관련해 ‘서해에서 번창하는 동네가 되라’는 뜻으로 서창(西昌)이라는 이름이 붙였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그저 지어진 이름을 보고 뒤에 갖다 붙인 말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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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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