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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수산동 경신마을

분류
남동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524
남동구 수산동에 경신마을이 있다. 한자로는 경신(慶信)으로 쓰는데,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이 이름이 원래 ‘신을 공경한다’는 뜻의 경신(敬神)에서 바뀐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옛날 이곳이 무당들이 살던 곳이었고, 용하기로 이름난 무녀(巫女)가 대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게된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경신무당’이라는 무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하지만 경신무당은 이곳에 살던 무당을 부르던 고유 명사로 ‘하늘을 공경하는 무당’이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저 ‘경신마을에 사는 무당’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이곳에는 병든 남편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일 만큼 헌신적 노력을 해 열녀문을 받았다는 한 무녀(巫女)의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경신이라는 이름은 이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있던 ‘경신역(慶信驛)’ 때문에 붙은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남동구 지역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원과 서울, 개성 등지로 이어지는 역사(驛舍)가 있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중림역(重林驛)인데, 이는 지금의 시흥시 지역으로 구한말까지 인천 땅이었던 소래(蘇萊)에 속해 있었다. 역은 조정이나 중앙 관서의 공문을 지방 관아(官衙)에 전달하거나 지방 관아의 공문을 중앙에 전달하며, 관리의 부임이나 여행 때, 또는 외국 사신의 왕래 때 마필(馬匹)을 제공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들어 이 중림역은 6개의 딸린 역을 둔 이 지역의 중심역 역할을 했다. 『인천부읍지』에 보면 “중림역은 인천부에서 동쪽으로 33리에 위치하였고 찰방(察訪) 1인이 근무하였다. 본도(本道)에 속한 역이 여섯인데 경신(慶信), 반유(盤乳), 석곡(石谷), 금륜(金輪), 종생(終生), 남산(南山)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경신역이 바로 이곳 마을에 있던 것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신(慶新)’으로 나와 있다. 경신역은 큰 역은 아니고 삼등역(三等驛)이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말은 큰 말이 1필, 기마(騎馬)가 2필, 복마(卜馬:짐 싣는 말)가 3필 등 모두 6필 밖에 없었지만 역의 노비(奴婢)는 66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돼 온 경신역은 시대가 바뀌어 가며 그 역할을 다해 1896년에 문을 닫고 없어졌지만 그 이름은 마을의 이름에 그대로 남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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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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