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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비류(沸流 : 서기 전 18년 미추홀 개국)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5689
비류는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남하하여 당시 미추홀(彌鄒忽)인 인천에 부족국가를 건설했다는 백제(百濟) 설화상의 인물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등극하는 주몽(朱蒙)이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피해 온 뒤에 졸본왕의 딸과 결혼했다. 졸본왕이 죽자 주몽은 그 왕위를 잇고, 이어서 비류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에게는 본래 동부여에서 결혼한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琉璃)가 장성하여 부왕(父王)을 찾아 졸본으로 온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또 하나의 소전(所傳)에 의하면 북부여왕 해부루(海夫婁)의 손자인 우태(優台)가 졸본으로 와서 졸본 여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주몽은 우태의 미망인을 왕비로 삼고 그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 뒤 부여에서 실자(實子)인 유리가 찾아와 주몽의 태자가 되고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위의 두 설화에 공통되게 비류·온조 형제는 졸본부여의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그 생모를 모시고 자기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망명하였다. 형제는 서울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온조는 지금의 서울 강동[풍납동]인 위례성(慰禮城)에 각각 본거를 정하였다. 서기 전 1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인천 쪽은 물이 짜서 백성들이 안거할 수 없었으며, 서울 강동 쪽은 한강을 끼고 안거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비류가 죽자 인천쪽 부족들은 전부 온조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온조는 그때까지 ‘십제(十濟)’라 불렀던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 단군과 비류는 ‘개국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고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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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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