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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규보(李奎報 : 고려 고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220
이규보는 만년에 동방(東方)의 시호(詩豪)로 불리어질 만큼 명문장가로서 알려지게 되었으나, 젊은 시절에는 불우한 처지를 견디어야 했다.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명종 20년(1190) 전시에 합격한 후, 고종 24년(1237)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문신(文臣)으로서보다 특히 문인으로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6권과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많은 저술을 통하여 고려 일대(一代)의 문운을 가름할 큰 업적을 남겼다. 동시대의 진엽은 백운거사[이규보]의 문장을 “적선(謫仙)의 일기(逸氣)가 만가(萬家) 밖에 서 있는 것 같다” 하였고, 최자(崔滋)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백운거사의 문집에 2천여 수의 시와 사(詞)가 남아 있으나, 생전에 7, 8천여 수에 이르는 시와 사를 지었다 하니 참으로 천부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조정을 강화로 옮기고 이 나라 국보로서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할 당시,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간절한 「기고문(祈告文)」을 지었으며, 『상정예문(詳定禮文)』의 발문에서는 이것이 주자(鑄字)를 사용하여 간행한 세계 최초의 주성활자(鑄成活字) 서책임을 밝히기도 했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외교문서가 백운거사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돌아볼 때, 그는 붓의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한 문호로 일컬어짐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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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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