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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최우(崔瑀 : 고려 고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776
고려 무신정권의 2대 집권자. 아버지 최충헌(崔忠獻)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자기가 축적하였던 금, 은, 진완(珍玩)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주었으며,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 등용하였다.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혔던 관리들을 유배 혹은 파면하였으며, 아우 향(珦)까지도 향락을 취했다 하여 귀양을 보내는 등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8년(1221)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집권자의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였다. 또한 몽골 난에 대비하여 의주(宜州 : 현재 德源), 화주(和州 : 현재 永興), 철관(鐵關 : 현재 鐵嶺) 등 요충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1223년 역시 몽골 침입에 대비하여 은병(銀甁) 3백여 개, 쌀 2천여 섬을 내고 기병을 동원하여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리하였으며, 황금 2백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강화 흥왕사(興王寺)에 안치하였다.
고종 19년(1232) 몽골에 끝까지 항전하고자 왕에게 강화 천도(遷都)를 청하고 나서 녹봉차(祿俸車) 100대로 가재(家財)를 강화로 옮기고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는 한편, 제도(諸道)의 백성을 산성과 해도로 피난하게 하고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에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晉陽候)에 봉해졌으며 1242년에 작(爵)이 올라 진양공(晉陽公)이 되었다. 1243년에는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백 섬[斛]을 바치는 등 장학에 힘썼으며, 특히 몽골군이 대구 부인사에서 초조 대장경을 불태워 버렸을 때 사재를 크게 희사하여 강화에서 재조 팔만대장경 판각에 착수, 16년만인 고종 38년(1251)에 완성을 보게 하였다.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붓글씨에도 능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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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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