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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충지(퀖止 : 고려 충렬왕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51
고려시대의 선승(禪僧)으로 9세에 처음으로 취학하였는데,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쉽게 외웠으며, 17세에 사원시(司院試)를 마치고 19세에 장원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 쪽을 희망하였으나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담고 있다가 29세에야 강화 선원사(禪源寺)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비로소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 여러지방을 순력하였는데, 도를 얻고자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원나라와의 항쟁이 끝난 뒤 원의 세조(世祖)는 탐라[제주도]에 총관부(總管府)를 두고 우리 나라의 ‘전지공안(田地公案)’과 ‘별고노비천적(別庫奴婢賤籍)’을 관장하게 하며 수선사에 군량미 명목의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이에 충지는 세조에게 「상원황제표(上元皇帝表)를 보내 빼앗겼던 전답을 되돌려 받았다.
이 표문을 받아본 원 세조는 그를 흠모하여 초청하는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그는 몇번 회피했으나 마침내 원경(元京)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세조는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빈주와 스승의 예로 대하였다. 충렬왕 9년(1283) 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를 출발하였는데, 이 때 거란본 대장경을 강화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원오국사를 맞이하여 나누어 가지고 와서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선정을 닦았으며 1286년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 사주(社主)로 왕에게 추천했을 때 입적했다. 시호는 ‘원감국사(圓鑑國師)’, 탑명(塔名)은 ‘보명(寶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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