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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범세동(范世東 : 고려 공민왕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79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로 정몽주(鄭夢周)에게 사사받았다. 공민왕 18년(1369)에 급제하였고 성리학자로서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과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을 편찬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강화읍 용정리(龍井里) 만수산 및 범옹골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에만 몰두하였고, 고려 말기의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요승 신돈(辛旽)의 핏줄로 왜곡시키려는 조선 왕조의 집권자들에 맞서 그들을 옹호하는 주장을 했다.
고려 멸망과 함께 용정리에 줄곧 숨어 살았는데, 그때부터 그의 성(姓)을 따서 그곳을 범옹골[范翁里]이라 하다가 후세인들이 범어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태조가 1392년 7월 16일 왕으로 추대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고 새 정권에 나아가지 않은 ‘두문동 72현’으로 손꼽힌 충절 인물로 숭앙받았다. 행촌(杏村) 이암(李햺)과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菴)에 갔다가 그곳에서 고서(古書)로 전해 내려오는 『북부여기(北夫餘記)』 상·하권을 썼는데, 현재 번역되어 조선상고사의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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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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