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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전신(全信 : 조선 초기)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92
고려 말의 명신이며 학자로, 젊은 시절에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문하에서 수학하여 청운의 꿈을 품고 고려조에 입사하여서는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392년 7월 고려조를 폐하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신하된 자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켜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1400년에 태종이 즉위한 후, 신하들에게 “나의 옛 친구 전공(全公)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고 찾으며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조선 왕조에 참여하기를 권하였는 바, 공이 답하여 이르기를, “흙은 편안히 이 몸담은 고장의 옛것이고, 몸은 기산(祺山 : 소 부[巢 父]와 허 유[許 由]의 은거지’에 끼친 자취로 굳히려 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선정을 본받고 있사오니 노신(老臣)은 소허(巢許)의 절개를 지키고자 합니다” 하였다. 태종은 이 말을 전해듣고, “오늘의 엄자능(嚴子陵 : 後漢人嚴光)을 말함이로구나” 하고 찬탄하면서 다음해 친히 그 마을을 방문했으며, 이 때문에 왕방리(王訪里 : 왕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전답 4백 결과 노비 3백 호를 내리고 그곳의 산을 사패지(賜牌地)로 특사하여 그 산 이름이 국사봉(國賜峯)이라 불려져 내려온다. 세종 6년(1424) 1월 17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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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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