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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황형(黃衡 : 조선 중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31
황형은 성종 17년(1486) 무과에 급제하고 혜산진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성종 22년(1491)에는 동북방에 있는 남만족 1천여 명이 침입하여 조산보(造山堡)를 점령하고, 서북 방면에서는 건주(建州) 초적(草賊)떼 1,500명이 침입하여 창주진(昌州鎭)을 포위하였다. 이때 각도 병사 2,400명이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에게 맡겨지고, 황 형은 그 선봉으로 종군하여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마을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어 중종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왜구를 평정하고 일본인 거류민도 모조리 추방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어 만주 국경 지대의 순변사(巡邊使)로 제수되어 여진족의 거듭되는 침범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평화를 되찾는 데도 공헌하였다.
이렇듯 전쟁터에서는 지략이 겸비된 명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의 시기와 모함이 지겨워 강화 월곶으로 낙행해 와서 여생을 보냈다. 노후 말년에도 백발을 휘날리며 열심히 나무 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 나무들이 임진왜란을 맞아 병선을 만드는 일에 실로 요긴하게 쓰여졌다고 하여 황 형 공의 선견을 모두 칭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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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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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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