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權慄 : 조선 선조 연간)
권율은 강화 선원 연동에서 출생했다. 선조 15년(1582) 46세에 비로소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었던 권율은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전주로 밀고 올라오는 왜병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맞아 이치(梨峙)에서 싸워 크게 물리쳐 호남을 지킬 수 있었으며 그 공로로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도성(서울)에 주둔한 왜병을 섬멸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수원 독산산성(禿山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방위 진지를 다시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적들은 승병 1천여 명을 합쳐 모두 1만여 명이 채 안되는 행주산성의 권율 진지를 공략한다는 결의 하에 총대장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이끄는 3만여 병력으로 맹렬한 공세를 취했다. 처음에는 함락될 위기에까지 처했던 행주산성은 그러나 일사불란한 조직력으로 사력을 다한 군관민 및 승병의 합세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무수한 시체와 기치(旗幟), 도창(刀創), 갑주(甲胄) 등을 유기하고 패주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閑山大捷)’, 김시민의 ‘진주대첩(晉州大捷)’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불린다. 권율은 그 해 6월 행주대첩의 공로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하여 영남에 주둔하였다. 선조 32년(1599)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강화로 돌아와 7월에 생을 마쳤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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