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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권순장(權順長 : 조선 인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857
권순장은 18세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일체 사양했다가 별제(別提)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노모를 모시고 강화로 피난하여 송해면 송뢰리 송정촌(松亭村)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강화 수비의 총지휘자인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사세가 급박해져 감에도 업무를 태만히 하며 주색에만 빠져 있었다. 권순장은 이를 보고 탄식하기를, “주상께서는 지금 남한산성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고군분투하시느라 안위가 알 길 없거늘 신하된 자가 어찌 태만할 수 있으리오. 적진과 부중은 지척간이라 앉아서 죽음을 자초하느니 함께 싸워 진충보국하자”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응모한 자가 약간 명이 되어 강화 월곶 연미정을 지키는 유성증(兪省曾)에게 예속시켜 수비에 임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유생들인지라 해상전투에 맞지 않아 육전 수어임무를 담당케 하라는 지시를 받고 남문에서 비빈(妃嬪)과 빈궁(嬪宮)을 호위케 하였다.
마침내 적군이 갑곶진을 함락시키고 침입해 오므로 두 아우를 피난케 하고 권공 자신은 김상용(金尙容), 김익겸(金益兼) 등과 더불어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화약고를 폭발시키고 생애를 마쳤다. 그의 아내 전주 이씨와 13세 되는 누이동생도 이 소식을 접하고 자결하였으며, 동생 순열(順悅), 순후(順厚)도 자결하였고, 노비인 의남(義男)은 권공과 함께 폭사하였다. 다음날엔 비녀(婢女)인 의녀(義女)와 계수(季嫂) 소씨(蘇氏), 종제수 이씨, 장씨 등 10명도 자결하여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해 강화유수로부터 절의인사(節義人士)로 추천이 있었는데, 순절자가 많은 집안가운데 권씨 가문이 으뜸이었다. 인조는 권순장에게 ‘지평(持平)’을 증직하였고, 자손들에게는 복록을 내리도록 하였다. 숙종 때에 이르러 이조판서, 좌찬성으로 증직하고 ‘충렬’이라 시호를 내렸다. 이어 강화 충렬사에 배향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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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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