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홍익한(洪翼漢 : 조선 인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31
홍익한은 인조 2년(162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35년 장령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했다. 이 난을 당하여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에게 죽었고, 부인과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전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다. 다음에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나라의 화를 피해 평양부 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의를 배척한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네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 하였고, 그들의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른바 그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이다.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를 비롯, 무려 전국 7곳의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