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이단상(李端相 : 조선 현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70
이단상은 인조 27년(1649)에 문과에 급제, 옥당(玉堂)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으매 대세가 변하므로 관직을 버리고 집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였다. 후에 청풍부사(淸風府使), 응교(應敎),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지냈으나 곧 사퇴하였다. 또한 홍명하(洪命夏), 송준길(宋浚吉), 조복양(趙復陽)의 추천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양주(楊洲)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37세 때에 인천부사로 부임하는데 행공(行公) 기간은 비록 몇 달에 불과했지만 이른바 ‘흥학변속(興學變俗)’ 등에 있어서는 자못 괄목할만한 업적이 있어 당시 경기 암행어사 여성제(呂聖齊)가 관내의 선치자(善治者)들을 복명할 때 이단상도 함께 상주하였다. 그러나 이단상은 관직보다는 학문으로 평가될 인물로, 당시 대표적인 노론(老論)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대표적으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와 사위인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희조는 유일(遺逸)로 천리되어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등을 거쳐 대사헌, 참판 등을 지낸 인물로 그도 후에 인천에서 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단상의 저술로는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람통기(聖覽通紀)』 등이 있으며, 학덕이 높아 상하에서 기용코자 했는데, 특히 현종이 통정(通政), 승지(承旨), 참지(參知)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퇴하고 현종 10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서연(書筵)을 모셨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과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되었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