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서필원(徐必遠 : 조선 현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29
서필원은 인조 26년(164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관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효종 9년(1658) 대사간과 승지에 이어 전라도 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으며, 기민(飢民)을 구휼하기 위하여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현종 6년(1665)부터 현종 10년(1669)에 걸쳐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근무하였는데, 백성을 다스리매 매(鞭)를 멀리하고 덕으로 다스렸다. 민정을 살필 때에는 유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하고 다녔으며, 아전의 민폐를 두루 살피어 기강을 바로잡으니 창고가 넘치고 격양가(擊壤歌)가 드높았다.
정포(井浦 : 현 내가면 외포리)에 따로 큰 창고를 짓고, 장지포(외포리 정포 : 양도건평)에 둑(인산리 앞뜰 간척)을 쌓고 옥토를 개척하였으며, 백성의 세액을 탕감하여 주어 주민의 복리 증진에 기여한 바 컸다. 후에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또한 왕의 북벌 계획을 도와 군비를 충실히 했다. 현종 10년(1669) 형조판서를 거쳐 3년 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 해 생을 마쳤다. 직언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鎭)과 함께 5직(五直)이라 불리었으며, 저서로 『육곡유고』가 있고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