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량(鄭羽良 : 조선 영조 연간)
정우량은 좌의정 휘량(牘良)의 형이다. 경종 3년(1723)에 문과에 합격한 후, 영조 4년(1728)에는 왕의 교서를 지어 한글로 번역, 각 도에 보냈다.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시독관(侍讀官)에 이르러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의 문집을 인판하기를 주청하여 그대로 인출하였으며,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좌승지에 이르러 선성의 후예인 공종수(孔宗洙)를 반관(泮館)에 두고 월봉을 지출할 것을 소청하여 그대로 시행하기로 되었다. 우참찬(右參贊)에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보직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는데,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에 글씨가 남아 있고, 인천 연수동에 있는 부친 정수기(鄭壽期) 묘(墓)에는 그가 찬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그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둘째 아들 치달(致達)은 영조(英祖)의 9녀인 화완옹주(和緩翁主)와 혼인한 부마(駙馬)이기도 하다. 인천시 동춘동에 위치한 후손 집에는 색채도 선명한 그의 영정(影幀)이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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