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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김창구(金昌九 : 조선 영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592
김창구는 서울에서 살다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고조부가 강화에 정착하여 살게 된 집안 자손이다. 그의 부친이 38세에 중병으로 기절하였다가 깨어난 후, 58세밖에 못 산다는 꿈을 꾼 것을 비통하게 여겨 쌀독에 성미를 저장하며 장수를 비는 기도를 해 온 이래 20년이 지났을 때, 마리산과 고려산에 올라 각 3일씩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눈보라가 심하였는데도 밝은 촛불이 꺼지지 않았고, 마지막 기도 날 어머니의 꿈에 무지개가 기도처인 향교(鄕校) 앞 우물에 꽂혔다. 해몽하는 이가 우물 정(井)자는 80세를 산다는 뜻이고, 사흘 기도를 올려 3년을 더했으니 83세로 수명이 연장되리라 풀이하였는데, 실제로 83세로 수를 마감했다고 한다.
어머니 병환 때도 역시 백약이 무효라는 진단을 받고 찬물에 목욕재개한 후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올렸는 바, 얼음이 손가락 모양으로 솟아났으며 갑자기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 하여 얼음 깨고 잡아들이니 병이 낫기 시작, 3년 간을 더 사시다 돌아가셨다 한다.
이 소문을 접한 강화유수 이병상(李秉常)과 그 뒤를 이은 김광세(金光世)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내렸으며 조정에 품의했다. 영조 48년(1772) 특명으로 그의 집에 ‘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지문(金昌九之門)’이라고 정문을 내리고, 아버지를 중추원(中樞院) 직책에 특임하여 효행을 기리었다. 이 밖에도 아버지가 돌아간 후,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했던 소망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옷을 입고 일부러 금강산에 가서 산을 둘러보고 소리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두 손자국이 남아 있는 묘소가 지금 선원면 선행리 노적봉 밑에 있으며 강화의 효행 가운데에도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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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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