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민진원(閔鎭遠 : 조선 영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30
민진원은 숙종 17년(169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숙종 23년(1697) 중시(重試)에 을과로 또 급제하였다. 숙종 31년(1705)에 강화유수를 지냈고, 숙종 45년(1719)에 강화구관당상(江華句管堂上)을 역임하기도 했다.
강화유수로 부임했을 때 강화 사람들의 인습이 심히 각박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고 상하의 예절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실상을 엿보았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이를 누른다 하여 옳지 못한 인습이 단시일에 고쳐질 리가 없으므로, 우선 행정 구역을 소동(小洞) 단위로 개편하여 행정에 편의를 도모함으로써 주민을 순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또한 한가한 농한기를 이용하여 선두포언(船頭浦堰), 선두포둑을 막아 섬이었던 하도면(下道面 : 현 華道面)을 강화 본도와 연육시켜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화도평야를 간척하고 하도 주민과 상도(현 양도) 주민들에게 많은 전답을 분배해 주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강화 내성을 신축하였으며, 남문 안파루(按波樓)와 서문 첨화루(瞻華樓)를 새로이 건축하여 강화 내성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민진원 유수가 재임하고 있을 당시에는 많은 강화도 주민이 부역(負役)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후세 강화도 주민들이 이르기를 ‘백년 간에 할 일을 2년 만에 모두 이룩하였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