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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정제두(鄭齊斗 : 조선 영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788
정제두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실패한 뒤,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32세 때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관직을 시작하여 74세 때는 사헌부 대사헌, 80세에는 의정부 우참찬, 88세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유학 풍토 속에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시켰다. 그리하여 양명학 사상의 주역인 그에게 영향을 받은 덕천군(德泉君) 계보 가운데 이광명(李匡明), 손서(孫壻), 이광사(李匡師), 이광신(李匡臣), 이초원(李椒園), 이충익(李忠翊), 이대연(李垈淵), 이면백(李免伯), 이사기(李沙機), 이시원(李是遠), 이상학(李象學), 이영제(李寧齊), 이건창(李建昌), 이경제(李耕齊), 이건승(李建昇) 그리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스승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등이 양명학을 주류로 삼은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이고 하곡(霞谷) 정제두는 그 비조(鼻祖)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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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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