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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문신의(文信義 : 조선 순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41
문신의는 강화 태생으로 순조 3년(1803)에 무과에 올라 참상선전관(參上宣傳官)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했던지라 조실부모했음에도 종신토록 성묘하였으며, 근검절약으로 자수성가하여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후덕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일찍부터 ‘의고(義庫)’라는 구휼(救恤) 창고를 짓고 빈한하고 고독한 사람이나 과부, 홀아비 등 역경으로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을 돕고, 혼상(婚喪)에 후히 부조하며 스스로는 일상 검소하게 지냈다. 특히, 현종 14년(1848)에 수재와 한재(旱災)가 거듭되는 흉년을 만나자, 굶주리고 병든 이재민을 위하여 재산을 아낌없이 풀어 구휼하니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뒤 향리의 주민들이 나서 그의 자선의 장한 뜻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도 했다.
우의정 김이교(金履喬)가 그의 구휼과 자선 행위를 조정에 주달(奏達)하니 왕이 친히 칭찬하며, ‘하진민당상통정대부(下賑民堂上通政大夫)’라 친필을 내리고 옥관자를 하사하니, 그가 땅에 엎디어 사은하면서 말하기를 ‘이 나라의 땅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우리 백성에게 베풀었거늘 그 무슨 덕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더욱 갸륵하게 여겼으며, 대신 이하 모든 사대부가 그를 흠모하고 존중하였다. 그가 행차하면 인근의 어린이들까지도 길을 사양하고 피하면서 호은공(湖隱公)이 오신다고 반기었다. 고종 23년(1886)에 고종께서 좌승지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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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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