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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어재연(魚在淵 : 조선 고종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946
어재연은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끝에, 고종 3년(1866)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때 군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 이번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공으로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6월 1일 손돌목 포격사건의 개시로 한미간 최초의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위급이 고해지자 어재연은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포로 급히 달려나가 6백여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에 이르러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드디어 미군이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하면서 격전 끝에 초지진을 점령하였고, 11일에는 덕진진까지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이 때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 양면작전을 개시하여 해상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지상에서는 야포 사격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끝내는 광성보로 돌입해 온 미군과 어재연 군이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손에 칼을 잡고 적을 무찔렀으며, 포탄 10여 개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적군에 던지며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불타는 충성심과 애국열의를 높이 추앙하여 병조판서 지삼군부사(兵曹判書 知三軍府事)를 추증받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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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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