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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연기우(延起羽 : 구한말)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834
연기우는 한말의 의병장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부교(副校)로 있다가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동지 지홍윤(池弘允), 이동휘(李東輝) 등과 전등사(傳燈寺)에 모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군 내 각 장병들을 설득하여 강화진위대 병사들이 의병전에 전부 뛰어들게 하였다. 진위대의 부교로서 그는 대장이 되어 우선 강화 무기고(武器庫)를 접수하여 무기들을 확보하고, 친일 집단인 일진회(一進會) 간부를 처단케 한 뒤, 일본인 순경을 사살하고 일본인 공무원을 추방하여 강화 전도를 삽시간에 장악하였다.
이후 일본 수비대 1개 소대가 갑곶진으로 상륙하자 일제 사격으로 패퇴시켰으나, 증원 부대가 늘어나자 화력이 딸려 강화도를 탈출하여 서해 지방으로 집결, 고랑포(高浪浦)에서 대한창의존양군(大韓倡義尊壤軍)을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대장으로 초대되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에게 본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는 장단을 필두로 삭령(朔寧), 적성(積城), 파주(坡州), 마전(麻田), 양주(楊州), 이천(伊川) 등지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 사살에 주력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오지로 숨어 다니며 게릴라 전법을 쓸 밖에 없었다. 연 대장은 그 뒤 3년여를 계속 지능과 용맹으로 과감하게 항전하니 일본군이 그때마다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점차 병력이 감소될 뿐만 아니라, 화약이 떨어져 가는 탓으로 지리산에 근거를 두고 호남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유격전을 지속하였다. 연 대장은 산중에서 풍찬노숙하며 2년여 간 혈전을 계속하며 끝까지 굴하지 않고 분전해 갔으나, 철마산(鐵馬山)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강화를 첫 싸움의 무대로 시작하여 전국이 그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내려졌고 또한 국립묘지 순국선열 위패로 현충사(顯忠祠)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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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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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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