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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오윤영(吳允榮 : 미상∼1971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49
오윤영은 궁내부(宮內部) 전화과(電話課)에 근무 중이었던 부친의 소개로 강화진위대 참령(參領) 이동휘(李東輝)를 방문하고 군인이 되겠다고 간청하여 부교(副校)로 복무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을 맞아 진위대가 강제 해산되자, 격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결연히 의병에 가담하여 김동수(金東洙)와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다. 강화에 있을 때에는 산악전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강화에서 전투를 계속하며 전전하다 일본의 증원군이 늘어나자 중과부족으로 강화를 탈출, 영정포(領井浦)로 철수하여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야음을 타 일진회(一進會) 출신 강화군수 정경수(鄭景洙)를 잡아다가 영정포에서 태형을 가했고, 양사면 철산리에 있는 강화 일진회장 양학수의 가옥을 불사르는 등 유격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 후, 뜻한 바 있어 서울 남산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마침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함께 철장 신세를 지게 되어 서로 국권 회복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출옥 후에도 다시 수차에 걸쳐 혁명유격대를 편성하고 항일 투쟁에 나서, 장단지구 마전시장에서 기마헌병 마쓰다[松田]를 사살하고 강원도 지방으로 옮기어 전전하면서 일본인이면 지위를 막론하고 저격을 가하는 등 신출귀몰하는 방법으로 적을 괴롭혔다. 그 후 상해 임시정부 의장인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격문을 휴대하고 김동수(金東洙)와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대구 관찰사(觀察使) 집에 밤을 이용하여 침입해 들어가 군자금 염출을 부탁하였으나 단돈 20원을 내놓으므로 즉석에서 권총으로 사살하고 물샐 틈 없는 대구의 감시망을 뚫고 유유히 서울로 잠적했다.
이후로 일경의 추적을 피하여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근거한 한국 독립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수없이 많은 교전을 하였으며, 그러던 중 김덕삼(金德三) 유격 독립군에 편입되어 독립운동 전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나 운 나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살인 강도 등의 죄명을 쓰고 10여 년 간 옥고를 치른 후 강화 양사면 덕하리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살다가 1971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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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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