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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유경근(劉景根 : 1877∼1955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5703
유경근은 강화읍 월곶리에서 생장하였다. 강화진위대 참령(參領) 이동휘(李東輝)와 제휴하여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육영사업 진흥에 힘쓰고자 강화·김포에 5개소의 사립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고 스스로는 광명학교(光明學校)라는 현판을 걸고 교장이 되어 봉사하는 한편, 국권 회복을 위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서울 국일관 집회에 참석하여 강화·김포 지구 독립운동 책임자로 발탁되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병으로 보석되었다.
1920년 8월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있는 광복단군영(光復團軍營) 참모장 이탁(李鐸)의 지령으로 잠입해 온 결사대장(決死隊長) 김영철(金榮哲)을 도와 무기 은닉에 협조하는 한편,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있는 이동휘가 독립혁명군을 양성하고 있는 해삼위(海參威 : 블라디보스톡)의 무관학교(武官學校)로 국내 혁명군을 모집하여 보내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수배되었음을 전해 듣고 미주(美洲)로 망명하기 위해 해삼위에서 일단 서울에 잠입하였다가 운 나쁘게 체포되어 3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국내에 은거하면서 은밀히 군자금 모금을 지속하였으며,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해삼위로 가던 중 함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강릉, 춘천, 서울형무소로 전전하며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에 출옥하였다. 그는 일제 탄압 아래에서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운동 선봉에 섰으며, 종손 유용갑을 비롯하여 정인섭, 최성창, 박길양(朴吉陽) 등과 제휴, 지하 공작을 지속하면서 3·1 만세운동 이후 독립군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했다. 해방 후 만주에 있던 독립군을 지원한 국내 유공자로서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예우를 받았다. 1955년 타계하니 국권 회복에 큰 공로만이 길이 빛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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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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