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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유봉진(劉鳳鎭 : 1886∼1956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88
유봉진은 강화 길상면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1919년 3월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3월 8일 길상면 온수리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 황도문(黃道文)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이튿날 교회에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3월 9일 교회에는 염성오(廉成五), 유희철(劉熙哲), 장흥환(張興煥) 등 수십 명이 모였다. 이 때 조종환(趙鍾桓)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 상황을 설명하고, 강화에서도 호응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가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황도문, 황유부와 다시 모여 이 달 18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강화군민에게’라는 궐기문을 곳곳에 걸쳐 배포하도록 하였다. 염성오는 3월 12일과 이튿날 13일에 걸쳐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각지에 돌리며 궐기를 종용하였다.
유봉진은 16일 홀로 주문도(注文島)에 가서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에게 독립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 호소하였으며, 마침내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이 운집하였다. 그는 예정 시간보다 약간 늦게 백마를 타고 달려와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 종각(鐘閣)에 올라가 종을 마구 울리며 시위 군중을 고무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화경찰서에서 염이선(廉履善) 등 4명의 조선인 순사보가 출동하여 제지하러 들자, 그들에게도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며 구타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몰려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치면서 불응하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다시 시위 군중을 향교로 몰고 가서 장터에서 체포된 유희철과 조기선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자고 제의하고 오후 5시경 경찰서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경찰서를 무너뜨려 없애버리겠다고 절규하면서 검거된 사람들을 전원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장터에서 칼을 뽑아 군중을 진압하려 했던 순사보 김덕찬(金德贊)을 응징하겠다고 호통했다. 그러나 무력 진압에 의해 사로잡혀 1920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대통령 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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