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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건승(李建昇 : 1861∼1928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833
이건승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오늘에야 목놓아 우노니)’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자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이에 기어코 국권을 회복시키는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하고서 애국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1906년 동지 권병효(權炳孝), 이선재(李善宰) 등 수 명과 협력하여 화도면 사기리(沙器里)에 고등학과 계열의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했다. 청소년에게 애국계몽사상을 고취시키고 구국교육운동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 계명의숙의 설립 취지를 국민개학(國民皆學), 무실(務實), 심즉사(心卽事), 실심실사(實心實事), 광개지식(廣開智識) 등으로 정했다. 그러니까 양명학적 세계관에서 신학문을 닦아 독립권을 쟁취 확보하자는 애국정신에서 발로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계명의숙은 1905년에 강화진위대 참령(參領) 이동휘(李東輝)가 제창한 보창학교(普昌學校) 진흥운동에 발맞추어 봉기한 계몽교육운동과 다름없었다. 이 학원은 그 때문에 국내에서도 으뜸가는 교육기관으로서, 교사들도 국내 굴지의 성가(聲價)를 올리던 뛰어난 교육 인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비록 1회 졸업생이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능한 애국 인사를 배출시켰다. 그 뒤 학원은 5년 간 지속되다가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일본에게 강탈당하자, 이건승은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 문원(文園) 홍승헌(洪承憲)과 함께 의론한 끝에 결연히 조국 광복의 새 웅지(雄志)를 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건너갔다. 이역만리 낯설기는 해도 옛 우리 조상들의 고구려 고토(故土)에서 동지를 널리 규합하고 젊은이들을 계몽 계도하는 일에 악전고투하다가 그 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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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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