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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능권(李能權 : 1864∼1900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141
이능권은 강화 국화리 출신으로 구한국 군대의 육군 대장이었다. 190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러 가는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밀사 일행을 호위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국외로 나갈 수 있게 도왔다.
국내로 다시 돌아온 1907년, 군대 해산령이 강행되자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소속 군인 3백여 명을 규합 편성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이 되어 우선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08년에는 의병 부대의 이름을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陳)’이라 명명하고 이호춘(李浩春), 유성준(兪成俊), 김추옥(金秋玉), 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 길상면의 방의표(方宜杓)로부터 1천 5백 냥을 받는 등 11개 처에서 4만 3천 8백 냥의 군자금을 조달받았다. 그리고 강화도 전등사에 은닉시켜 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 준 송계찬(宋桂燦 : 전등사 주지)을 화도면 장화리 장곶 앞바다로 끌고 가 바다에 밀어 넣어 죽임으로써 이적 행위자를 징벌하였다. 또한 휘하 분대장 차만복(車灣福)으로 하여금 대원 28명을 이끌고 교동(喬洞) 경찰주재소를 습격케 하여 군검(軍劍)과 의류를 탈취했다. 이어 친일분자들인 김유영(金裕榮) 등 동류 3인의 집을 습격하여 7천 3백 냥의 군자금을 탈취하였다. 또한 휘하 이경석(李庚錫)의 병졸로 하여금 부근 해역을 통과하는 범선 1척을 멈추게 하여 적재한 쌀 20 포대를 군량(軍糧)으로 거두어 오게 했다. 그리고 이능권의 병대장 막하에 있는 강화 동문동 김덕순과 같은 대원인 지홍일(池弘一), 조인선(趙仁善), 박계석(朴啓石) 등 10여 명에게 지령하여 1908년 7월 삼산면 상리 농민으로부터 군자금 1백 원을, 석모리에서 또한 1백 원을, 양사면 철산리에서 1천 원, 서도면 끝섬[末島]과 볼음도에서 4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부근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원 야스다[安田]를 처형하고 군자금 2백 원을 탈취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요시무라[吉村]도 이 때 연이어 처형하였다. 또 이능권 의병장의 막하인 김용기(金龍基)로 하여금 박계석, 고부성(高富成)과 더불어 1908년 8월 일본 관헌에게 밀고를 지속해 온 양사면 철산리 거주 일진회장(一進會長) 양학진(梁學辰)과 강화읍 동문동에 거주하는 헌병 보조원 송대현(宋大鉉)을 강화읍으로 들어오는 길목 송해면 솔정리에서 처형케 했다.
이로 인해 박계석은 4년 뒤인 1912년 10월 일본 헌병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은 끝에 운 나쁘게 붙들려 서문 밖 국화리 노변에서 사살되었으며, 고부성은 같은 무렵 서문 안 외골목에서 붙들려 총격을 받았으나 경상을 입고 도피했는데, 어느 노파의 집에서 갈증으로 물을 얻어 마시다가 밀고당해 끌려가서 사살되었다.
이능권 의병부대는 이렇듯 혁혁한 전적(戰績)을 올리며 전투를 전개해 가면서 1908년 10월 상순경에는 강화도 내 일본인들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월 하순 경, 일본군 제6사단이 제13사단과 한국 감시의 임무를 교대하게 되면서 제6사단장 니시야마[西山助義] 중장은 용산의 제13사단에서 1소대를 뽑아 강화로 보내어 강화의 의병 활동을 괴멸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야마[小山] 소위가 이끄는 30명의 이른바 토벌대가 10월 29일 서울을 떠나 인천에서 강화로 급파되어 30일 오전에 광성진(廣城津)에 상륙하였다. 이 때 독립군 의병부대는 정족산(鼎足山) 전등사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드디어 의병부대는 고야마 소대와 1주간에 걸쳐 전투를 계속하였고, 격전 끝에 격퇴시킬 수 있었다. 고야마 소대는 결국 강화읍으로 퇴각하여 서울 본대에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제13연간 소속 보병 20명과 공병 15명이 증파되어 와타나베[渡?] 중위의 지휘 아래 전등사 의병부대 진지로 다시 출진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증원군을 예상하여 와타나베 부대가 전등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곳으로 나뉘어 이동한 뒤였다. 이에 고야마 소대는 강화 남쪽에 있는 장봉도(長峰島) 일대를 수색하고, 와타나베 부대는 강화섬 북쪽 지역인 별립산(別立山)과 양사면 철산리(별칭 산이포)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의병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행동이 기민한 의병부대를 강화에 그대로 남겨둔다면 일본군에게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므로, 니시지마 사단장은 강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계획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일본군은 강화에 150여 명의 큰 병력을 증원 집결시키고 3일 동안 강화 전역을 수색하였으나, 일시에 의병의 기습을 받아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원대 복귀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의병들은 하점면 이장리 부호인 이 감찰(李監察) 댁에 이르러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고, 이어 양사면 철산리 월곶 마을에서 교전하여 역시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의병들은 고려산 동남쪽 산기슭 느라골에 무기를 은닉하고 각처에서 기습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능권 의병장은 정탐 임무를 띠고 단신으로 서울에 잠입하였다가 감시망에 걸려 붙들리는 바 되었다. 이어 사형 집행을 당하자 한강변에 가매장하였다가 야음을 이용하여 시신을 파내 강화읍 국화리 초입에 평토 매장하였으며, 1955년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에 ‘의병대장양성이공능권지묘(義兵大將 陽城李公能權之墓)’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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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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