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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동휘(李東輝 : 1872∼1935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893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20세 전에 지방 관청의 용인(傭人)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와서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육군 참령(參領)에 올랐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이끌었다.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군대 해산을 당한 통분한 입장인지라 1909년 3월 군대 동지인 연기우(延基羽), 김동수(金東秀) 등과 더불어 강화 전등사에서 의병 조직과 궐기의 모의를 획책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붙잡히고 유배를 당했는데,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활약으로 10월 초순 무렵 풀려났다. 이 해에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11년에는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무관 출신이었으나 한편으로 교육문화사업에서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1905년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있을 당시 강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보창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08년에는 강화 양도초등학교의 전신인 흥천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 목사를 움직여 합일학교를 신설, 개교하였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6년 오상규(吳相奎), 유진호(兪鎭浩) 등과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 계몽을 위한 단체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여러 활동과 아울러 1915년에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1919년 8월 말경에는 김립(金立)의 사위인 오영선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기 위하여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고, 취임 후 자파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민족진영의 인사 일부까지도 규합하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였다. 이것의 발전 형태로서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의 레닌으로부터 2백만 루블의 원조를 받았으며, 그 중 4십만 루블은 고려공산당 조직 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에 발각되어 사임하였다. 한편, 만주·간도 방면의 독립운동 무장단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왔다.
1920년 말에는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군에 쫓겨 밀산(密山)을 거쳐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퇴각할 때에 긴급 구호금으로 1만 원을 보냈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반일민족독립운동을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사임한 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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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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