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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최상현(崔尙鉉 : 1871∼1933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34
최상현은 강화 신문리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재에 밝아 치부(致富)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학문에도 뜻을 두고 정려하여 재산가이면서 박식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내리교회 미국 선교사인 존스 목사와 의병장이 된 진위대 참령 이동휘(李東輝) 등과 교류하며 서양 선진 문명국의 새로운 교육제도 등에 계몽되는 한편, 주체성 있는 민족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1901년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잠두의숙(蠶頭義塾)에서 직접 교편을 잡고 교육생활을 체험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선두에 나서서 제자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면서 만천하에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한 까닭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일본 통치자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다. 그 때문에 주모자로 검거되어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물론 그의 제자들도 대부분 적극 가담자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그는 한층 더 교육에 정혼을 다 바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주입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강화에서 인천 사이를 왕복하는 연락선 회사 가운데 일본인이 소유한 회사가 항로 운영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배 삯을 싸게 하는 등 상도의에 어긋나는 처사를 해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를 압박하자, 이에 선생이 나서서 일본인들의 기만 행위를 폭로하여 일본인 상인들이 발붙이지 못하는 땅이 되게 하기도 했다.
선생은 돌아가기 직전에 부인에게 전재산을 학교 운영을 위해 쓰도록 유언하였고, 1985년 공립학교로 바뀔 때까지 그 유지가 이어졌다. 1933년 62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는데 후사가 없어서 학교장(葬)으로 장례를 지냈고, 이에 전교생이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 1935년 학교 교정에 상반신 동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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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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