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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고일(高逸 : 1903∼1975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568
고일은 서울 태생이다. 한 살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이주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때는 양정고보 학생이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곽상훈(郭尙勳)을 회장으로 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양정을 졸업한 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되었다가, 1924년 최남선(崔南善)이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자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기자 활동을 하면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유치장 출입이 다반사가 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간 영어(囹圄)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북만주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다시 언론계에 복귀,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위시하여 조선·고려·한국통신 등 여러 통신사의 편집장을 역임하다가 6·25 동란이 일어나자 충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4년 「주간인천」의 주필로 활약했으며, 1960년 인천신문 논설위원으로 사설(社說)을 집필했고, 경기일보에 ‘인천사(仁川史)’를 연재했다. 1956년부터 인천시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고, 1964년 재위촉되어 1971년 「인천시사(仁川市史)」가 간행되어 나오기까지 인천 향토 언론계의 원로(元老)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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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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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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