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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박창례(朴昌禮 : 1910∼1983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633
박창례는 인천 출신으로 창영학교를 마치고 계속 면학의 뜻을 펴나가기 위해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진학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2학년 때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외 강의록으로 와세다(早稻田) 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와 같이 가난하여 배움의 길을 걷지 못하는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천에서 이옥녀(李玉女)와 함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에 진력했다. 먼저 도원동 보각사(普覺寺)에서 강당 일부를 빌어 당시 성냥공장과 정미소에 다니는 여공 1백여 명을 모집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6개월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이흥선(李興善) 정미소 창고를 빌려 여공 30여 명을 데리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이마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분서주하여 일본인의 토지를 임대하게 되었고, 각계의 유지들로부터 480원(圓)의 기부를 받아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동명학원(東明學園)의 기초를 다졌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현재의 동구 송림동 114번지로 교사를 이전하고 6년제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 학교는 개교 이래 박 교장의 교육 이념으로 말씨 곱고, 예절 바른 학교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같은 교육계에서의 공로로 1957년에는 인천시에서 시민상(市民賞)을, 1964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특공상(特功賞)을, 1966년에는 소년한국일보의 ‘훌륭한 어머니상’을, 같은 해 경향신문교육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1년 정년을 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을 수상했으며, 1982년 한국일보가 제정한 제1회 교육대상(敎育大賞)을 수상했다. 1983년 학교 재단의 재정을 확립시켜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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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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