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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하상훈(河相勳 : 1881∼1964년)

작성자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2255

하상훈은 동학(東學) 농민봉기 때 부친이 해주(海州)에서 옮겨와서 답동 터진개 근방에서 객주업을 시작하여 번창시켰다.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으로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부조합장을 맡아 민족상권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 초기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역임했고,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國樂) 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만들어지자 인천지회장에 추대되어 활약했으며,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민주의원(民主議員)과 입법의원(立法議員)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6년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1952년 제3대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에 인천시 고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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