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천인물

권필(權킠 : 조선 광해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804
권필은 희세(稀世)의 문장가로 강화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선조 20년(1587)에 사마시에 으뜸으로 급제했으나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은 벼슬하기를 싫어했다. 선조 34년(1601)에 칙사(勅使)가 이항복과 더불어 선생의 시문(詩文)을 보고 탄복하여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순릉참봉(順陵參奉) 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기도 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강화 홍의촌(현 송해면 하도리)에 거주를 마련하고 머물렀다.
광해군 3년(1611)에 어느 선비가 전시(殿試)에 제출한 시문에서 왕비의 척분인 유(柳)씨네 세도를 꼬집는 내용을 담았던 연유로 광해군에 의해 그 선비는 합격자 명단에서 취소되고 말았다. 이를 아깝게 여긴 권필이 무명의 선비 편을 돕는 궁유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했는데, 이 시문이 이이첨의 음모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은 황혁(黃爀)의 몰수당한 집 문서 중에서 나온 탓으로 1612년 의금부(義禁府)에 구속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은 다음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옥문을 나와 주막에서 행인들의 동정 어린 술잔을 받아 마신 다음 대취했는데,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도져 그 해 4월 17일 숨을 거뒀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 문의처 032-440-838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