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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황선신(黃善身 : 조선 인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96
황선신은 선조 30년(1597)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 1월 청나라가 강화도를 공격 침입하려 하자, 강화군 중군의 직책으로 강화유수 장신(張紳),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 등과 함께 강화도의 월곶진 연미정(燕尾亭)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였으나, 당시 강화수비의 총대장인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 안일한 작전 지휘를 하여 갑곶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황선신은 혼잡을 이룬 아군 패잔병을 규합하여 방어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효종은 세자가 되기 전 봉림대군(鳳林大君)이었던 당시, 황선신의 죽음을 목격하였기에 특지로 병조참의를 제수하고 주란헌(柱欄軒) 사당에 배향케 했으며, 현재까지도 강화읍 북문 밖 송악골에 남아 있다. 뒤에 강화 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정조 16년(1792) 정조는 그의 충렬을 기려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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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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