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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유척기(兪拓基 : 조선 영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572
유척기는 숙종 40년(1714)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제수된 이후 여러 직책을 거쳐 경종 1년(1721)에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6년(1730) 4월에 강화유수로 발탁되어 부임하였는데, 마침 강화 지역에 흉년이 들어 이농가가 속출하는지라 긴급 구호미를 방출하여 구휼사업에 힘썼다.
또한 영농기구가 부실하므로 그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편리한 농기구의 창안, 보급에 힘을 썼다. 그리고 당시 유일한 교육기관이며, 백성들 정신의 지주였던 향교가 유수부에서 내려다보이는 신문리의 낮은 지대에 있어 존엄성에 저해된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후에 영조에 의하여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영조 46년(1760)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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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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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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