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훈(郭尙勳 : 1896∼1980년)
곽상훈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경인간 기차 통학을 할 때부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 야구팀인 ‘한용단(漢勇團)’의 응원단장이 되어 일본팀과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적개심에 불타는 응원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이래 1923년에는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제4호 대장이 되어 활약하였고, 1924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하상훈(河相勳),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최선경(崔銑卿)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도 활약했다.
해방 후 1948년 인천에서 제헌(制憲)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 검찰차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5대까지 당선하여 국회전원(全院) 의원장, 국회부의장,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民議院)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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