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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조원시(趙元時·G. H. Jones : 1867∼1919)

작성자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550

조원시는 미국 뉴욕주 출신으로 1888년 약관 20세로 선교사가 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 처음 5년 간은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 출판 사업을 하다가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인천 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파견되어 11년 간 내리교회(內里敎會)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선교와 교육 전반에 걸쳐 놀라운 업적을 쌓아올려 ‘내리의 아버지’라 지칭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교회 이름으로 된 교육기관인 영화학교(永化學校)를 인천에 개설했으며, 강화와 황해도 연안(延安), 해주(海州) 그리고 남양(南陽)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1895년 만수동에 최초의 지교회(支敎會)를 개척하였고, 1897년에는 우각동(牛角洞 : 현 금창동)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했다. 또한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회(神學會)를 조직하여 이동식 학교를 개설하였고, 1900년에는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를 금창동에 건축하였다. 1901년에는 한국선교회가 3개 지방회로 확장되면서 인천에 한국 최초의 서지방회(西地方會)를 조직하여 장로사(長老司)로 취임했다. 또 1901년 성탄절을 기해 내동 현 위치에다 80평 규모의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902년에는 홍승하(洪承河) 전도사를 선교사로 한 하와이 이민회사를 조직하여 50명의 교민을 이민시켰다. 1903년 11년 간 헌신 봉사한 내리교회를 떠나 서울로 전임했다. 그의 부인인 존스 여사 또한 영화여학교를 세움으로써 이 고장 여성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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