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고려시대

인천지역사회가 경험했던 해상교통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대외관계에서 매우 개방적이었던 고려왕조가 개성에 도읍하면서 더욱 확대·촉진되었다.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자연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정비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부평[수주(樹州)]에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한 것이다.

안남도호부에는 원인천[소성현(邵城縣)]과 시흥·양천·통진· 김포 등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제 인천지역사회가 ‘꼬레아’로 서방세계에 알려지는 고려의 국제교류의 관문으로 정립된 것이다.

인천지역사회는 이후 고려왕조 일대에 걸쳐 날로 번성하여 갔다. 먼저 인주 이씨의 왕실과의 혼인으로 경원군(慶源郡; 숙종 때)이 되고, 이어 다시 인주(仁州 : 인종 때)로 그 위상을 높여갔으며, 고려 말에는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 : 1390)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고 부평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서 길주목(吉州牧 :1308)으로 승격되었다가 부평부(富平府 :1310)로 고쳐졌고, 강화는 몽골(蒙古)의 침입 이후 40년 가까이 피난수도 [강도(江都)]로 자리하면서 대몽항쟁의 중심을 이루어 그 위상이 극에 달하였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또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1392) 강화도에 이룩하였던 모든 문물·시설과 인천지역 경원부의 위용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고 말았지만, 고려 500년 동안의 인천지역사회는 명실공히 수도 개성에 다음가는 번화했던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