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은 유교지치주의(儒敎至治主義)를 내걸고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해금책(海禁策), 곧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황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내·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인천지역 사회도 자연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평범한 농·어촌으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고려왕실의 잔재 청산과 중앙집권의 강화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仁川郡 : 1413) 으로 강등·축소되고, 강화·부평 등도 군사적 의미만을 지니는 일개 도호부(都護府)로 하락되고 말았다.

경원부의 지난 날 이름인 인주(仁州)에서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는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라 ‘인(仁)’자와,  ‘천(川)’자가 합해져서 ‘인천(仁川)’이라는 행정구역 명이 비로소 나오게는 되었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인천 지역사회는 자급자족적인 한적한 농·어촌사회로 존속하였다.

그러다가 1600년을 전후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연달아 겪으면서 인천 지역사회는 다시 한번 국방상 요충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장처(保障處 : 왕실과 조정이 잠시 피난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곳)로 하고, 대륙세력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강화도를 보장처로 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면서 남한산성의 경영과 함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 해안지역의 방어체제와 시설이 새롭게 보강되어 간 것이다.

이리하여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인천지역사회가 강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육·해군의 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행정·군사 편제상의 변동이었을 뿐, 이 지역의 사회구조나 주민 생활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 오지는 않았다. 다만,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 강도(江都)시절부터 추진되었던 강화도의 갯벌 매립사업이 한층 확장되어 오늘날의 강화평야를 이룩하는 지형적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通商)을 요구해 오기 시작하자, 이들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 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 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 기능하게 되었다. 서양세력들이 서해안지역, 그 중에서도 수도 한양(漢陽)에 이르는 입구[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인천 해안으로 밀려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은 끝내 인천해안에서 군사적 충돌,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를 일으켰다. 전쟁의 주무대가 된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 때보다 크나 큰 상처를 입었지만, 500여 년 만에 다시 한번 조국수호의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과 국내 정세의 변화로 끝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修規 : 강화도조약)에 응하고 말았다(1876).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일본과의 교린(交隣)정책이 무너지자, 중국(청나라)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둘러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문호개방으로 이른바 은둔국(隱遁國)이라 불렸던 조선도 그 문호를 세계에 개방하게 된 것이다. 원인천은 바로 이 같은 역사의 현장이 되었고, 또 문호개방의 최전방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정부도 이들의 조선 진출을 가능한 한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제물포에는 인천해관(海關; 1883)과 인천감리서(監理署 : 1883)가 설치 되고,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 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 : 1884)가 들어 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 지역이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의 개항’을 제물포 개항으로부터 기산(起算)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