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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일신동 항동(航洞), 황굴, 항굴

분류
부평구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972
이 마을은 현 부개초등학교가 있는 마을(마분리 안말)에서 남쪽으로 논틀을 건너 등성이를 넘으면 남향으로 배 모양같이 길게 자리한 부개산록의 마을로서 철거되기 전에는 5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 형국이 마치 항해하는 배와 같아서 배가 항해하는 마을 즉 항동(航洞)이라 하였으며 항굴 또는 황굴로도 불렀다. 항동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황굴에는 동리 안에 우물이 없었고 대신 동구 밖 저 멀리에 대동우물을 파놓고 모두 그 물을 길어다 먹었다. 왜냐하면 황굴 동리의 형국이 항해중인 배와 같아서 만일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배 밑창을 뚫는 격으로 배가 파선되기 때문에 마을 안에는 절대로 우물을 못 파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때에는 미신타파가 성행하는 시국이어서 이 마을 젊은이들이 하나 둘 자기 집에 우물을 각기 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후에 이 마을 전체를 비롯하여 무너미고개에서 구산동 일대를 모두 일본군의 군수기지로 수용 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한 집도 안 남고 모두 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 살게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배가 침몰한 셈이다.
그러나 중세국어시기(14∼16세기 말) 이후의 고어(古語)에서는 ‘크다’는 의미의 단어가 ‘하다’였으며 이것의 관형사형이 ‘한’이었다. 따라서 현대어의 큰골은 한골이 되고 이 한골이 동화(同化)되어 항골도 되고 또 황골도 된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실제로 항동리 지역을 보면 큰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항동은 배가 항해하는 것 같은 동리가 아니라 단지 큰 동리 또는 큰 골짜기를 뜻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항굴, 황굴은 항골, 황골의 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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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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