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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이의배(李義培 : 조선 인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611
이의배는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출사하지 않고 마리산(摩利山) 및 하도(下道 : 현 華道)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모의에 가담하고 반정 후 통정(通政)으로 승진, 명천부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공청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가 병자호란을 맞았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소식을 듣고 임지의 속오병(束伍兵) 수천 명을 모아 출전을 서둘렀다. 광주(廣州) 부근 죽산에 당도하여 다음날 남한산성으로 향발하려다가 전봉장 이차형(李次衡), 이근영(李根泳)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결국 중과부적이 되어 영남근왕병(嶺南勤王兵)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다시 진격하였다. 경상좌절도사 허완(許完)과 우절도사 민영(閔泳)의 군과 함께 광주에 정족(鼎足)으로 진을 치니, 적이 먼저 좌군을 공격하였고 치열한 접전 끝에 아군측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너지자 비장(裨將)의 피신 경유를 물리친 채 살아남은 노비 축생(丑生)과 노심초사 끝에 힘이 다할 때까지 맞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위의 허완, 민영 등 양절도사도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공을 가상히 여겨 이의배 부자 및 허완, 민영 등 양절도사 및 노비 축생 일체를 장려하였다. 이의배는 처음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나, 곧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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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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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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