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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연평도 조기잡이 신 임경업 장군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2325
조선 16대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 태종이 우리 나라를 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의주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술을 청나라 태종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는 의주를 피해 돌아서 다른 길로 서울을 공격했다. 적군이 의주를 피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장군은 급히 군사들과 함께 도성으로 오려 하였으나 십만 대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격렬한 싸움이 계속 되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인조 임금께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끊고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며 항복을 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 태종은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다하도록 요구했다. 청 태종은 돌아갈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 장군은 땅을 치며 거듭 탄식하며 말했다.
“이 오랑캐 놈들, 내 이 원수를 꼭 갚으리라.”
충성심이 강한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두 왕자를 모셔 올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마침내 장군은 명나라와 조선이 청나라 몰래 힘을 합친다면 청나라를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명나라로 가야 하는데 만주를 통해서 가는 길은 모두 청나라 군사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다. 결국 바다로 갈 수밖에 없어서 장군은 상인으로 변장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장군과 함께 이 어려운 길을 동행할 상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양 마포에서 서성이던 장군은 쌀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이 쌀장수는 어찌나 욕심이 많던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장군은 쌀장수의 그런 점을 이용하여 그에게 다가가, “주인장, 큰 돈을 벌어 보고 싶지 않소?” 
쌀장수는 큰 돈을 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장군에게 어찌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장군은 이때다 싶어 자신과 동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했다. 그리고 이곳은 곡물 값이 싸니 그 곡물을 가지고 의주로 가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쌀장수는 장군의 말이 그럴 듯하여 당장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커다란 배에 많은 양곡을 싣고 서해로 나가 의주로 향할 수 있었다. 배는 며칠간 순조롭게 나아갔다. 그런데 배가 의주로 가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뱃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고 안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임경업 장군의 추상같은 명령에 더 이상 항의하지는 못했다.
상인들과 선원들은 배 한 구석에 앉아 어떻게 하면 뱃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한 상인이 꾀를 내었다. 연료나 식량이 떨어지면 천하의 임경업 장군도 어찌할 수 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장군 몰래 먹을 양식과 물, 장작 등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장군에게 가서 식량과 장작이 모두 떨어져서 이대로는 어디도 갈 수 없으니 육지에 배를 대고 먹을 물, 식량들을 구해 다시 떠나자고 했다. 임경업 장군은 이들이 육지에 닿는 즉시 돌아가려는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배를 가장 가까운 섬 연평도에 대라고 했다.
배가 섬에 닿자 장군은 먹을 물로 소연평도와 연평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담으라 했다. 상인들은 ‘바닷물은 짜서 먹을 수도 없는데…’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의 바닷물은 짠 소금물이 아닌 마실 수 있는 민물이었다. 장군은 땔감은 산에서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식량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장군이 선원들에게 가시나무(엄나무)를 많이 꺾어 오라 했다. 선원들이 가시나무를 꺾어 오자 장군은 그것을 간조 때에 맞추어 안목 어장터에 꽂아 놓으라고 했다. 선원들이 생각하기에 장군의 명령은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한들 없던 식량이 생기나?”
그러나 선원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다시 물이 나가는 간조가 되자 장군은 선원들에게 어장 터에 나가 보라고 했다. 놀랍게도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고기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장군은 이 고기를 양식으로 삼아 명나라로 계속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임장군이 잡는 방법을 처음 알아내어 잡은 물고기가 조기였다. 연평도 사람들은 그 후로 조기 잡는 법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조기를 많이 잡아서 생계를 잇고 있다.
임경업 장군은 후에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는 몸이 되었지만 장군이 연평도에서 가시나무를 이용하여 조기를 잡은 일화는 조기잡이의 시초로 두고두고 전해 온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파시가 열릴 만큼 조기가 아주 많이 잡혔다.
또한 조기를 석수어(石首魚)라 부르는데 조기를 말리는 과정에서 돌로 눌러 말린다고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조기 머리에 흰 돌같은 것이 박혀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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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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