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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설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왔다는 소래포구

출처
옛날 옛적에 인천은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2
조회수
5937
매년 11월 무렵 김장철이 되면 서울에서까지 새우젓 등 젓갈과 해물을 사려는 주부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는 신선한 어물로 유명한 도시 안의 포구로서 인기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 때문에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어떤 향토 사학자들은 소래라는 지명의 유래를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던 당시의 전설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즉 신라 무열왕 7년(660)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를 도우러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와 상륙한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정방의 군대가 왔다’는 뜻에서 소정방의 첫 ‘소(蘇)’자와 온다는 뜻의 ‘래(來)’가 합쳐져 소래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당시 소정방이 이곳으로 상륙했다는 내용은 옛 문헌에 나와 있지 않으며, 금강 하구인 기벌포를 통해 상륙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소정방이 소래에 상륙했다는 이야기는 증명이 되지 않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화와는 다르게 어학적 측면에서 소래의 지명에 대해 설명하는 해석도 있다. 소래가 산처럼‘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뜻하는 우리 옛말‘솔’에서 나온 지명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 산이 바로 해발 299미터의 소래산이니 그럴 듯한 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좀더 살을 붙여 산과 냇가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솔내’로 불리다 소래가 됐다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래는 이보다‘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수리’에서 모양이 바뀐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래라는 이름은 결국 순수한 우리말이 변화된 형태일 뿐 지금 쓰이는 한자의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셈이 된다.
문헌상에는 대부분 소래(蘇來)라고 표시돼 있는데 언제부터 우리말 소래가 이 같은 한자로 쓰이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그것이 언제 어떤 이유로 지금과 같이 소래(蘇萊)로 쓰이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한편 소래산에는 병자호란을 예고한 암석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소래산 동쪽 봉우리에 있던 큰 암석이 갑자기,
“우르릉 쾅쾅.”하는 큰 소리와 함께 굴러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구르던 여세로 옆의 서쪽 봉우리로 올라가 중턱에 멈추는 것이었다. 암석이 굴렀던 자리에는 큰 고랑이 파여 있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있나?”
“아니, 저같이 큰 바위가 저절로 굴러 내려왔다가 다시 굴러 올라가다니….”
나무를 하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무도 건드린 사람이 없는 데다가 저절로 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으려는 것이 아닌가.”
“글쎄.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생길까.”
그 같은 일이 있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병자호란을 일으킨 것이다.
“동쪽에 있는 바위가 서쪽으로 굴러 올라간 것은 서쪽에 있는 중국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사람들은 이 암석의 변고가 곧 청나라의 침략을 예고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소래는 아무래도 중국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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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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