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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정철(鄭澈 : 조선 선조 연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담당부서
문화재과 (032-440-8383)
작성일
2013-12-01
조회수
1260
정철은 명종 16년(1561)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선조 13년(1580) 45세때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보여주었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에 가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 충청, 전라도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東人)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 송정(松亭 : 송해면)에서 지내다가 58세로 생을 마쳤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그가 강화 송정에 와 있을 때 승지 홍찬서(洪贊緖)와 진사 고자원(高自元)과 이웃하고 살았는데, 왜군 함선이 송정 앞바다에 이르러 지명(地名)을 물어 왔다가 송정이라 대답하니 상륙하지 못하고 훌쩍 물러갔다고 한다. 연유는 왜군이 침공해 오기 전에 점을 쳐보니 송(松) 자가 붙은 고장에 가까이 가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온 탓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임진왜란 때 강화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의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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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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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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